우리가 그냥 잘 살게 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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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9 13:27
글쓴이: 장석영
<우리가 그냥 잘 살게 된 게 아니다.>
‘그 때 그 현장 못 다한 이야기‘를 써 달라는 원고 청탁이 있어서 낡아빠진 취재수첩을 뒤져봤다. 다행이 두 가지 정도 소개할 내용이 있어서 졸필을 들었다. 그 한 가지는 독일(당시는 서독)에 취재차 갔을 때 보고 들은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근대정치에서 일어났던 줄거리의 소개다.
먼저 신문사에서 유럽의 몇 몇 잘 사는 나라들을 취재하러 가서 독일에 들렸을 때 들은 이야기이다.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의 주선으로 예정된 취재를 끝내고 짬이 나기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무역업으로 성공한 대학 후배의 안내로 스위스 관광길에 나섰다.
후배는 아우토반이라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도로의 역사를 설명했다. “아우토반은 1920년대 말 히틀러가 만든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입니다. 히틀러는 이 도로를 전쟁을 위해 만든 것이지만, 이 도로가 있었기에 세계 2차 대전 후 독일 경제 부흥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고위직으로는 아마도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이 도로를 지나가 봤을 것이라고 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그가 들려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에 관한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박 대통령의 방독은 단군 이래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국빈으로 외국에 초청된 첫 사례일 겁니다. 그런데 당시 서독정부가 한국대통령을 초청하게 된 동기는 한국인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근면성실하고 헌신적인 태도 때문이었지요.” 후배는 당시 감격적인 장면들을 마치 기록영화라도 보는 것처럼 설명해 나갔다.
독일은 우리나라 광부가 가지전엔 유고슬라비아나 터키 혹은 아프리카 등지에서 광부들을 데려다 섰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너무도 게을러서 결국 광산을 폐쇄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온 광부들이 투입 되면서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이런 사실을 서독 신문들이 ‘한국인은 근면한 민족’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달 급여 120 달러에 보너스를 지급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고 한다.
또한 서독이 간호사가 필요했던 이유는 자국민들이 ‘간호사를 3D 업종’이라면서 기피하는 현상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특근수당을 많이 준다고 해도 야간에 일할 독일인 간호사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간호사들을 데려왔지만, 처음엔 ‘후진국에서 왔다’면서 주로 영안실이나 호스피스 병동에서만 근무하게 했다.
그런데 한국인 간호사들은 환자가 사망하면 시신을 붙들고 울면서 염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유가족이나 관계자들이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서독 간호사가 자리를 비우거나 하면 한국인 간호사들은 주사도 놓고 환자를 극진히 보살피는 것을 보고 우리 간호사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위급한 환자가 피를 흘리면서 병원에 실려 오면 한국인 간호사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그 피를 온 몸에 흠뻑 적시면서도 응급환자 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만약 피가 모자라 환자가 위급한 지경에 빠지면 직접 수혈을 하여 환자를 살리는 등 그야말로 헌신적이었다.
이를 지켜 본 서독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간호사가 아니라 천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은 서독의 신문과 방송에 연일 대서특필됐다. 서독에서의 소식은 유럽 전체로 퍼졌고, 유럽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동양에서 천사들이 왔다”고 말했다. 이렇게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미담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자 서독 국민들은 “이런 국민들이 사는 나라의 대통령을 한 번 초청해서 감사를 표하자”는 여론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독협회 바그너 의장의 경우는 치료차 병원에 오면 꼭 한국인 간호사만 찾곤 했다. 그러자 기자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바그너 의장은 “한국인 간호사는 주사를 하나도 아프지 않게 놓는 기술자여서 그런다”: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지켜 본 서독 정부도 “그냥 있을 수 없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 정부로서는 이 초청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지 말라고 해도 가야할 다급한 실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준비를 했으나 큰 난관에 봉착했다. 일행이 타고 갈 비행기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이 가진 비행기는 일본만을 왕복하는 소형여객기 뿐인데 이것으로는 서독까지 날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아메리칸 에어라인을 전세내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군사 쿠데타를 한 나라의 대통령을 태워갈 수 없다’고 항공사에 압력을 넣어 그 마저도 무산되고 말았다.
궁리 끝에 서독에 특사를 보내 비행기 편을 얻어 보기로 했다. 창피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한국정부는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던 최두선 선생을 특사로 보내 뤼브케 대통령을 예방케 했다. 최 특사는 뤼브케 대통령을 만나 간곡히 간청했다. “각하, 우리나라에는 서독까지 올 수 있는 비행기가 없습니다. 각하께서 비행기 한 대를 보내주실 수 없으시겠는지요?” 뤼브케 대통령을 비롯해 서독의 관계자들은 최 특사의 이 말에 깜짝 놀라며 한참 말을 못했다고 한다.
결국 홍콩까지 오는 서독의 여객기가 서울에 먼저 와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을 1.2 등석에 태우고 홍콩으로 가서 이코노미 석에 일반승객들을 탑승케 한 후 방콕, 뉴델리 카라치 로마를 경유해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1964년 12월 6일. 루프트한자 649호기를 타고 간 박대통령 일행은 쾰른 공항에서 뤼브케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회담을 한 뒤 다음날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우리 광부들이 일하는 탄광지대인 루르 지방으로 갔다.
그곳 강당에는 서독 각지에서 모인 간호사들과 대통령이 도착하기 직전까지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탄가루에 범벅이 된 작업복을 입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새까만 얼굴을 본 박정희 대통령은 목이 메어 애국가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더니 연설을 하던 중에 그만 울어버렸다. 광부들과 간호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부등켜 안고 통곡의 바다를 이루는 광경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고,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들도 함께 울었다.
“연설을 마치고 떠나는 대통령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대통령이 차를 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각하 만세‘를 외쳤습니다.“ 후배는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가슴이 벅찬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 역시 가슴이 뭉클했다.
”뤼브케 대통령의 차를 함께 타고 돌아오던 박 대통령은 차속에서 계속 우셨다고 합니다. 뤼브케 대통령은 그런 우리 대통령에게 자기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 “대통령을 붙들고 우는 국민들이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서독사람들은 하나같이 탄복해 마지않았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이 방문한 후 서독정부는 제3국의 보증이 없이도 한국에 차관을 공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국제관례가 있어 한국광부와 간호사들이 받는 월급을 1개월간 은행에 예치하는 조건으로 1억 5천 9백 마르크(상업차관 1억 5백 마르크, 재정차관 5천 4백 마르크)를 공여했다.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이 본국에 보내는 송금액은 연간 5천만 달러였다고 한다. 이 달러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화학공업에 투자되었음은 물론이다.
“서독에서 피땀 흘린 광부와 간호사들이야 말로 조국 근대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위대한 ‘국가유공자’ 들입니다.” 그러면서 후배는 지금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아우토반이 우리 대통령이 달렸던 바로 그 고속도로라고 강조했다. “우리 대통령은 그날 고속도로를 달려오다가 세 번이나 차를 세우고는 도로상태 등을 면밀히 조사하면서 우셨다고 합니다.”
다시 취재노트를 뒤적이면서 ‘이런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잘 사는 대한민국이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서 얼마나 암담한 시간을 보냈나.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대한민국의 국정을 맡겨서는 안 될 자를 속아서 선택한 결과였다. 불행은 한 번으로 끝내야 한다. 그래서 희망이 있는 나라를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