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는 출신이 머슴이었다.
공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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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8 20:02
이동휘를 제끼려다 독립군 말아 먹은 홍범도.
홍범도는 출신이 머슴이었다.
그가 독립군에 가담했던 이유는 주인을 때려 죽였기 때문인데,
이유는 세경이 밀렸다는 것이었다. 홍범도는 스스로 밝혔듯이 일제의 검거를 피해 도피처로서 독립군에 들어갔다.
강골 장신 홍범도는 일단 허우대가 먹혔다.
당시 독립군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몰락한 양반 가문들이었다.
일본으로부터 토지를 잃었기 때문인데, 일본이 강탈한 것은 아니었고 토지 조사를 해보니 양반들이 연고 없이 병합한 그런 토지들이 많았고 이를 몰수해 소작하던 농민들에게 배분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양반 계층은 그런 일제에 반감이 컸다.
안중근도 그런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다. 그는 청년 시절에 뛰어난 사냥 기술을 이용해 동학 농민들을 잡아 학살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머슴 출신의 홍범도는 양반 가문들이 주도하는 독립군 조직에서 인정받아야 했는데, 그러려면 본인 스스로 성과를 만들어야 했다.
홍범도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문약했던 양반들이 주도하는 독립군에는 전술이 있을리 없었다.
또 전투가 있더라도 양반 출신 간부들은 나서지 않았다.
조폭 조직으로 치면 무식하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깡좋은 홍범도가 행동 대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별거 아닌 성과를 독립군 계파들은 서로 부풀렸다.
그래야 자기 계파의 주도권이 인정받고 커지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파였던 김좌진을 중국 공산당에 동조했던 세력들이 거부하면서 양반 계급에 적대적이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홍범도를 띠운 것이다.
당시 이들은 청산리 전투보다 봉오동 전투가 더 컸다고 했으며 청산리 전투도 사실 홍범도가 일본군에 대한 이간계로 승리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홍범도는 그렇게 부풀려졌다.
그렇게 커가던 홍범도는 그러나 독립군이 일본군 토벌에 밀리면서 함께 연해주 방면으로 이동하게 되고 그곳에서 라이벌을 만나게 된다.
이동휘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문무를 겸비한 양반 후손이었다.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았던 이동휘는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인품과 지식이 뛰어났고 이미 공산주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 정치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임정도 그를 인정해 지도부에 편성했고 그를 추종하는 이들도 많았다.
연해주로 밀려난 독립군들은 무장력을 얻기 위해 소련에 접근했고, 이 과정에서 상해파 공산주의자들과 이르쿠츠크 공산주의들 간에 반목과 대립이 생겨났다.
이들은 서로 각기 다른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고 있었는데, 홍범도 부대는 초기에 상해파 공산주의자들 편에 있었다. 그러다가 은근 슬쩍 이르쿠츠크 공산주의자들 편으로 이동했다.
같은 공산주의라도 유교적 유산이 강했던 양반 출신들의 상해파 공산주의자들은 주체성을 지키려고 들어서 한인 지원에 의존했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던 이르쿠츠크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음을 홍범도는 눈치챘던 것이다.
문제는 이동휘였다.
그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에 연합을 위해 노력했다.
홍범도는 그런 이동휘를 제거할 기회를 얻으려면 자신은 이르쿠츠크 파에 서서 상해파를 몰아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홍범도 부대가 상해파를 배신하고 이르쿠츠크파에 서면서 독립군 내부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로서 홍범도와 이동휘는 암묵적인 라이벌 관계가 됐다.
당시 독립군 사이에 가장 큰 관심은 이동휘와 홍범도 중에 누가 사령관이 되느냐였다.
하지만 둘의 차이는 현격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앞에서 홍범도는 러시아 말을 해야 했는데, '다, 니엣' 두 단어 밖에 하지 못했다. 반면 이동휘는 러시아어가 유창했고 공산주의 이론에도 해박했다.
당연히 소련이 이동휘의 자질을 알아 보자, 홍범도는 초조했던 것이다.
양반 주인을 때려 죽이고 도피하기 위해 독립군이 된 홍범도로서는 또 양반가 출신인 이동휘의 수하로 들어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도 컸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거느리는 추종자들에게 면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조폭들의 생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자유시참변을 여기서 자세하게 쓸 수는 없지만,
홍범도는 소련이 연해주로 들어온 독립군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으로 보인다.
핵심은 러시아 스바보드니(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에게 소련이 무장해제를 요구한 것에 대해 홍범도 부대는 따랐고, 상해파 독립군 부대는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소련군의 진압에 홍범도 부대만 살아남고 모두 몰살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홍범도가 이르쿠츠크파와 무슨 딜을 했는지 역사적으로 밝혀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상해파 입장에서 이르쿠츠크파를 통합하려던 이동휘는 완전히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련은 홍범도조차 사실은 신뢰하지 않았으며, 홍범도는 헛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홍범도는 상해파 독립군 포로 재판에 심의위원이자 증인으로 참석해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서 상해파에 대한 소련의 숙청을 정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어 극장 수위나 하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사실은 급여도 넉넉하고 여배우들과 노닥거리며 살았던 편안한 삶이었다.
그는 독립군 재건을 하자는 고려인들의 건의와 요청을 묵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