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응작전 & 마지막 임무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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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작전 & 마지막 임무종결

공작새 1 5,781 2021.07.29 17:43

이글은 허위가 아닙니다.
그간 유사한 내용을 접했던 분이라면... 직접 경험하거나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추고 있지 않은 추상적인 측면을 접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이유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시점 이전에 누군가 해야 될 우리군에 선발된 자로서 19세의 나이에 서울에서 현지 지원 입대하여 이와 관계된 문제가 군사적으로 예민한 문제라 하여도 음지에서 분단 조국을 위해 7726명의 용사들이 희생된 사실을 기억되길 바라면서 수차례의 대응작전중 세간에 이미 유포된 마지막 작전을 산자로서 증언하는 것입니다.

북한군의 대남 도발이 극심했던 1968년 1월21일 북한군 124군부대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기습 사건에 우리군에 선택된 특수임무수행자들이 오랜기간 혹독한 특수훈련을 견디어 내고 조국을 위해 소리없이 헌신해온 나라사랑 정신과 분단국가 국민으로서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많은 분께 알리려는 뜻으로 단편적이고 기교없이 반복해 올린 것을 처음 접하는 분을 위해 이해를 바랍니다.
[작성자 김정식]

침투 3일째, 북방한계선 앞에서 07:47분경 약600m 거리에서 계곡을 올라오는 적GP병력과 이동초소 병력이 보급로를 따라 후방으로 이동하는 적 병력의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을 전개하기로 팀원들과 결의했다.
5명의 팀원중 나는 행동조로서 동료와 보급로에 크레모아를 7m간격으로 4발을 설치 오솔길을 지나가던 적병들이 주고받던 마지막 대화는 "야 그건 아니야" "정말 이야요" 그말을 끝으로 언덕위에서 3명의 동료가 동시에 터트린 크레모아에 귀는 먹통이 되었고 몽롱한 상태에서 후폭풍에 모자와 물안경이 날라가고 오른팔과 머리는 불에 그을려 적군복이 불이 붙어 오른팔에 화상을 입었으나 앉아쏴 자세와 허리총 자세로 지향사격을 했다.

계곡은 자욱한 연기와 불붙은 낙엽 잎파리가 휘날려 시야를 가렸으나 연기가 거치는 순간 5~7m앞에서 뒤엉켜 쓰러져있는 적 병들에게 30발 탄창 2개 60발로 근접사격 납치하려고 후미에 쓰러져서 나를 바라보고 욕을 하는 표정의 적 장교의 권총 사격에 그와 동시에 사격을 가해 사살했으나,

나는 심장을 비껴서 왼팔 알통 부위를 관통해 경동맥이 끊겨 솟구치는 출혈에 얼굴과 위장한 적 인민군복은 온통 흥건하게 적셔져 아침 햇살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피습된 적병은 내가 언뜻 보아도 십수명이지만 정확한 인원은 입원중에 알았다.
아군GO 두곳에서 포대경으로 적군의 피습된 인원을 차량에 실어 카운트확인(18명),

아군지역을 향해 나오다 언덕위에서 지원사격하던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탈출중 당초 피격당한 적군 병력외에 낙오된 채 따라오는 적군 병력이 더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적 병들의 추격과 집중 사격에 다시 왼쪽 복부를 관통해 쓰러졌다. 사면초과 상태로 완전 노출된 상황이라 탈출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죽드래도 적에게 노획물을 남기지 않기 위해 부축하던 동료에게 내총을 건네주고 탈출하라 했다.

그 뒤 수류탄의 안전핀을 빼버린 채 손에 쥐고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극심한 통증에 아~ 하고 입을 벌리자 막혔던 고막이 뚫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피 보니 뒤쪽에서 여러명의 적병들이 먼저 탈출하는 전우들을 향해 사격을 하는듯 귓가를 스치는 '피웅' '탁콩' 총소리가 요란하고 적GP에서도 계곡을 훤히 내려다보고 포복하여 움직이는 나를 향해 중화기를 퍼부어 댔다.

그러나 천운인 듯~ 나는 적군이 매설한 지뢰지대에 쓰러졌기에 추격병들은 내가 총상에 죽은 것으로 알고 더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지혈을 해야 겠다는 생각에 수류탄을 손에 쥔 채 압박 붕대로 한번을 감았으나 쿨럭대고 흐르는 피가 지혈에 도움이 된 듯 왼손은 권투 글로브 처럼 부플어 올랐다. 긴박한 상황에 지혈이 되니까 수류탄 처리를 생각하다 턱으로 돌멩이를 움직여 틈새에 끼워 넣었다.
살 수 있겠다는 판단에 움직였으나 왼발과 왼손은 움직일 수 없었고 오른팔과 오른발로 포복해 오랜 시간 사투끝에 군사분계선 100m 북쪽지역에 도착했으나 더는 움직일 힘이 없고 출혈 때문에 눈커플이 내려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손가락도 움직일 기력이 없는데다 갈증이 심해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큰 나무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보면서 잠이 밀려왔으나 멀리 아군GP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보다 런링셔스를 찢어서 옆에 떨어져 있는 나무가지에 매달아 흔들었다.

아군GP에서 흰 천을 흔드는 것을 포대경으로 발견하고 워키퇴키로 매복나간 첩보대원들께 연락해 10여명이 중무장을 하고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구조되었다.
강인한 정신력과 삶을 향한 의지력 덕분에 위태로운 상황을 벋어난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화천지역 통문 앞엔 길가에 늘어선 장갑차와 탱크 십여대 완전무장한 많은 장병들과 7.15.27사단장들 7사단으로 노재헌 2군단장이 타고온 경비행기를 타고 응급 후송되어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이다.

이날은 북한의 노동당 창당일이 였기에 대낮에 허를 찔린 북한군은 아군GP에서 남방한계선 통문으로 내가 후송되는 지프차에 2발의 무반동포 발사로 전방 군에 경계령이 발효됐다.

그간 수차례 전개된 작전을 성공하였고 부상을 입었기에 그것으로 모든 임무가 종결된 것이다. 춘천 군 야전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서울 삼청동 수도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장시간 지혈했던 왼팔과 복부관통상을 수술받고 다음날 의식을 찾게 되었다.

간호 장교가 내 얼굴을 소독 꺼스로 가시넝쿨에 찍힌 상처와 얼굴에 모기약을 뻬치카 끄름을 섞어 발랐기에, 닦아내고 있어 정신이 들어 눈을 뜨자 동그란 원을 그린 듯 여러명의 사복 차림과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 보고 질문을 계속하던 모습과 병실엔 혼자 입원해 구석 벽면 책상 위에 수북히 쌓인 과일, 과자류, 병실에 2명의 부대원에게 일주일 가량 간병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특수공작팀원들은 작전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권한에 의하여 충무무공훈장 등을 수여 받았으며, 현재 생존자는 모두 전상국가유공자이며 특수임무수행부상자다.

북한이 우리의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도발하던 시기에 우리군의 누군가 해야 될 비공식 작전을 위해 안전가옥에서 북으로 출발전에 신변정리를 위해 이발할때 모아둔 머리카락과 미리 모아둔 손발톱을 포장히여 이름을 써냈던 사선에서 생환 됐기에 그간 쌍여온 극심한 공포속에 수차례 임무수행에 살아 남았다는 안도감은 오랜세월 잊혀지질 않는다.

그러나 이같은 사례는 1972년 7월4일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시점 이전에, 시신도 찾을수 없는 적진에 침투해 북한지역과 비무장지대에서 소리없이 사라져간 7726명의 호국용사들을 결코 대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시절 북한군의 무력 도발에 특수공작원으로서 시기. 장소. 유형. 공헌도. 희생도 등, 다양한 유형으로 우리군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소리없이 전개된 비공식 작전이 세월의 흐름속에 점차 잊혀져 가는 현상이 염려되어 이같은 사례를 역사의 페이지로 알리려는 마음이 앞선 것이다.
또한 앞서간 죽은 자를 추모하려는 산자로서 전상국가유공자로서 특수임무수행부상자로 무공수훈자로서 자랑스런 자긍심을 간직하고 있다.



(사)21세기안보실천연합 이사장 김정식

[이 게시물은 공작새님에 의해 2026-01-17 19:33:5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Comments

공작새 19:01
단체 일을 오랜 기간 하다 보니... 글을 쓰는 표현 방법이 초창기 때, 보다는 조금 나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8남매 장남으로 가정 생활이 너무 열악했기에, 공식 학력은 초등학교 뿐이다. 다만 나름 학구열에 대한 의지가 있었기에, 공사판 노동. 신문 배달. 하면서 한 학기도 채우지 못하고 고등공민학교를 여러 곳에 옮겨 다닌 것이 전부다. 배운게 없고 머리 속에 입력된 게 없어서 강하게 반론을 펴지 못하는 게 많아서 답답함 뿐이다..